어느덧 취업을 깊이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사실 4학년이 되어서야 취업의 방향을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생각 없이 살았다는 증거였다. 나의 전공은 취업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렇기 때문에 동기들은 이미 저마다의 진로를 결정하고 스펙을 쌓고 있었다. 나는 4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발등에 불이 떨어져 취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은행원이 되기 위한 준비를, 또 다른 이는 공무원 준비를 하는 등 각자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했다. 다만 학교에서든, 교회에서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힘껏 살았던 것이 전부였다.
내가 존경하는 교회의 누군가로부터 군무원이 장래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분 역시 군무원이었고, 열심히 공부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다만, 군무원도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국가고시를 치러야 했기에 1년에 한 번 정도의 기회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1년에 한 번이라는 너무나 적은 기회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대학 시절에도 공무원에 대한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막상 취업이라는 현실이 눈앞에 다가오자 완고했던 마음은 모래성처럼 쉽게 부서졌고, 결국 딱 2번만 시험을 쳐보자는 심정으로 군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학생으로서의 마지막 1년이 훌쩍 지나갔다.
첫 번째 군무원 시험을 치게 되었다. 생각보다 시험을 잘 봤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탈락이었다. 탈락의 충격을 어느 정도 수습하고 난 후, 군무원 시험에 다시 1년을 더 투자할 것인지 아니면 취업을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도저히 1년 동안 공부만 할 자신이 없었다. 몇 년씩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용기와 뚝심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럴 만큼의 용기와 뚝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군무원 시험을 포기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교육 관련 중소기업에 입사하게 되었다. 영업과 마케팅이 섞여 있는 업무였는데, 다소 내성적인 나에게는 많은 부담이 될 법한 업무였지만 의외로 일 자체는 무척 재미있었다.
적성에 맞는 일이었지만,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업무상 접대를 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했고, 교회를 다니는 나에게 접대를 위해 술을 마시는 문제는 큰 고민이 되는 부분이었다. 굳이 신앙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잦은 술 접대는 나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했다. 아직 20대의 나이임에도 원인 미상의 호르몬 문제가 발생했고,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되니 마음에도 아픔이 찾아왔다. 일터로 가는 운전석에서 가끔 핸들을 꺾어 생을 끝내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는데, 아마 이 시기의 내 마음이 정말 많이 아팠던 것 같다.
더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미래에 대해 진지하기 시작했다. 다른 회사로 갈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비슷한 환경인 건 마찬가지였기에 아예 다른 분야를 선택하는 것도 고민하게 되었다. 지금의 선택이 앞으로의 내 삶을 크게 변화시킬 것이 분명했기에 매우 신중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