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의 어느 날, 문득 내가 쌓아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동안 쌓아왔던 농구선수라는 이름의 탑은 이미 무너져 사라진 뒤였고, 새롭게 쌓아야 할 곳은 기초도 제대로 다져지지 않은 모래사장이었다. 무엇보다 앞으로 어떤 이름의 탑을 쌓아야 할지, 내 꿈이 무엇인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나는 다시 [복실이]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그 아이는 나와 눈을 마주친 채 아무 말 없이 그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눈물을 흘릴 때면 마치 위로하듯 나의 얼굴을 혀로 핥아주었다. 그리고는 나의 품에 ‘쏙’하고 들어와 쓰다듬어달라며 낑낑거렸다. 나를 괴롭히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일단 한 번 시작해봐. 뭘 하든지 성적이 나와야 하고 싶은 걸 선택할 수 있지!”
[복실이]는 나에게 눈빛으로 말했다. 오랜 시간 방황하고 고민한 끝에, 일단 한 번 부딪혀 보기로 했다. 고민만 하고 있어봐야 답이 나오지도 않았으니까 말이다. 사놓기만 하고 보지는 않았던 참고서와 문제집을 다시 꺼냈다.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최소한 알아야 하는 기초 중의 기초를 쌓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기출문제를 푸는데 쏟아부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남들이 3년 넘게 쌓아 온 노력과 기초들을 내가 단시간에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수많은 실전을 경험하는 것 밖에 없었고, 남은 고등학교 2년의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잘하고 있어. 앞으로도 그렇게 최선을 다해보자!”
[복실이]의 칭찬은 나에게 더욱 많은 힘을 주었다. 이제 조금은 나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자신감도 생겼다. 공부는 힘들었지만, 집에 돌아가면 그 아이가 나를 반겨주었고 위로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힘이었고, 덕분에 힘든 순간들도 잘 극복할 수 있었다. 어떤 이는 내가 노력하는 원동력이 강아지의 위로 덕분이라고 하면 미친 X이라고 생각하고 웃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알 것이다. 때로는 누군가의 말보다 내 옆에 있는 반려동물의 행동과 눈빛이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말이다.
내가 살던 동네에 꽤 유명한 학원이 있었는데, 내 친구들 중에도 그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많았다. 물론 나는 학원에 다니진 않았다. 당시 나는 교회 활동을 꽤 열심히 하였는데, 아마 내 또래의 자녀가 있는 부모의 눈에는 그게 썩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네 친구처럼 교회만 열심히 다니고 공부 안하면 절대로 좋은 대학교에 갈 수 없다.”
그런 학부모 중에는 본인의 자녀에게 내 이름을 거론하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학원을 운영하던 원장도 나는 절대 대학에 갈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조금 속상했지만, 오히려 교회 생활과 학업 모두 열심히 하는 나를 응원해주는 고마운 어른들도 많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고마운 말보단 속상한 말에 귀를 기울이던 시기라 내 마음엔 상처가 더 많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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