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rea story : 나 그리고 세상/1. 복실이에게 보내는 편지

[복실이에게 보내는 편지] Ep9. 산책

고려로드[coreaLord] 2024. 11. 16. 01:06

 

 

시간은 흘러, 어느덧 수능일이 되었고 거짓말처럼 모든 시험이 끝났다. 그동안의 노력과 수고가 단 하루의 시험으로 결정된다는 것이 서글펐지만, 그보다는 시험이 끝났다는 사실과 함께 해방감이 먼저 들었다.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를 반겨주는 건 [복실이]였다. 부모님은 아직 퇴근을 하지 않으셨기에 나는 그 아이와 함께 동네를 산책했다.

 

항상 이 녀석과 함께 걷던 길인데, 그 날은 뭔가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겪었던 많은 일들이 생각나면서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였다.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시기를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내 앞에 서서 졸랑졸랑 걸어가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이 녀석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아주 큰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 아이는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나에게 와서 안아달라고 낑낑거렸다. 목이 말랐을 수도 있고, 다리가 아팠을 수도 있겠지만 그 때는 왠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나에게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 아이를 품에 안고 동네를 다시 한 바퀴 돌았다.

 

집으로 돌아오니 부모님이 퇴근해서 기다리고 있으셨다. 시험 잘 봤냐고 물으시고는 답도 듣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이후 조용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했다. 우리 가족은 밥 먹을 때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아서 유난히 조용한 편이다. 어린 시절, 식사 도중 아버지에게 질문을 했다가 혼난 적이 있을 정도다. 특히 밥을 남겨서 혼난 적도 많은데, 당시에 위장이 작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식성 때문에 밥그릇이 너무 컸다. 또 편식한다고 혼나기도 했는데, 신기하게도 [복실이]가 온 뒤로는 한 번도 밥 먹다가 혼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고통스러웠던 식사시간이 점점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다만 지금도 그 변화의 이유는 알 수 없는데, 부모님께 물어봐도 그 이유를 모르셔서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복실이]는 우리 집의 분위기를 많이 바꾸어 놓았다. 무뚝뚝한 아버지와 표현을 잘 안 하시는 어머니, 그리고 나 역시 집에서는 무뚝뚝한 편이라 가족 간의 대화가 많지 않았다. 그 아이가 온 이후에도 여전히 대화는 많지 않았지만, 말소리는 예전에 비해 조금씩 늘어났다. 부모님께서 그 녀석에게 표현하는 말들은 내에게는 한 번도 하신 적 없는 것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그것이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아마 원래 받아보지 않았던 것이라서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뀐 분위기는 참 좋았다. 집에서 말소리가 많아지고 누군가가 표현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꽤나 즐거운 경험이었다. 아마 그 덕분에 조금씩 나의 메마른 감정에도 물을 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중·고등학교 내내 인기가 없는 아이였다. 여자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내 외모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그래서 고백도 많이 하고, 차이기도 많이 차였다. 그나마 고3이 되면서 조금씩 외모에 관심을 가진 덕분에 점점 사람다운 외모를 되찾을 수 있었다. 또한 [복실이]와 함께 지내는 동안 감정 표현에도 점점 익숙해졌다. 그렇게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사람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꽤 괜찮은 대학교 생활을 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